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보이아 가문 (문단 편집) === [[이탈리아 통일]](1861~1871)과 불안정한 치세(1878 ~ 1922) === 19세기 유럽을 휩쓸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빈 체제]]가 붕괴되고 이탈리아도 민족주의의 물결에 휩쓸리자 사보이아 왕가는 이탈리아 북부 대부분을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섰다. 그러나 국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채 패배하여 카를로 알베르토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퇴위하여 망명하였고 후계자였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즉위하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민족주의를 무기로 삼았던 자유주의 세력을 억누르고 친정 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카밀로 카보우르|카보우르]]를 중용하여 [[리소르지멘토]]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도움을 받았고 1860년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교황령]]의 [[움브리아]]와 [[마르케]]가 속한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를 병합하는 대신 대대로 세습해온 가문의 고향 사보이아와 프랑스에 인접한 항구도시 니차를 [[프랑스 제2제국]]에 넘겨주었다. 1861년 3월 17일에 토리노에서 소집된 [[이탈리아 왕국]]의 첫 의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Re d'Italia)의 칭호를 수여하였고 정식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출범을 선언하였으나, [[교황령]]이 잔존한 [[로마]]와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는 [[베네치아]]가 남아있어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베네치아는 1866년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 편에 합세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매입 후 주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합병하였고, 로마와 [[라치오]] 지방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군]]이 로마를 빠져나간 틈을 타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령을 폐지하고 로마를 수도로 선포하면서 최종적으로 병합시켰다. 사보이아 백작가에서 시작한 사보이아 가문은 시대가 흐르면서 사보이아 공가·시칠리아 왕가·사르데냐 왕가·이탈리아 왕가가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통일 후유증으로 인한 이탈리아 내부의 불안한 정국을 해소하고 다른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 확장을 위하여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도와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이 [[메넬리크 2세]]에게 대패하면서 좌절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패전으로 오히려 사회불안이 가속화되었고 심지어 [[움베르토 1세]]는 [[몬차]]에서 암살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독일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양 진영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연합국 측에 힘을 실어주는 태도를 취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면서 이탈리아인이 다수 거주하던 [[트렌티노알토아디제]]와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고리치아]],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반도|이스트라 반도]], [[자다르|차라]]를 획득하였으나 얻은 영토와 배상금은 그리 크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